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드리 헵번 (문단 편집) === 은퇴 이후 ===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f19d8a8a4f03c7be697cbc8104d2e13e.jpg|width=100%]]}}}|| 영화계 은퇴 이후 [[유니세프]]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, 그런 활동에서 미소짓는 노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고,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.[* 1990년대 삼성의 기업 광고에서도 이에 착안하여 "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'로마의 휴일'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였습니다"라는 문구를 쓴 바 있다.] 특히 1992년 '''암 투병 중'''임에도 [[소말리아]]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. 이러한 행보를 기리고자, 이후 유니세프에서 이름을 딴 '''오드리 헵번 인도주의상'''(Audrey Hepburn Humanitarian Award)을 [[케이티 페리]]에게 수여하기도 했다.[* 케이티 페리는 2013년 12월에 유니세프 홍보대사로 위촉되었으며, 미국인으로써는 열 번째로 임명되었다. 첫 번째는 대니 케이이고, 두 번째로 선정된 인물이 [[마틴 루터 킹]]의 친구이기도 했던 [[해리 벨러폰테이]]이다. 1927년생이지만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, 빌보드 연말 차트 1위가 1956년에 신설되었는데 첫번째로 1위를 거머진 인물이 바로 벨라폰테이다. 그 또한 인권활동과 자선활동으로 굉장히 유명하다.] 또한 유니세프에서 주최한 [[대니 케이]][* 이 분 역시 할리우드의 명배우였으며, 자선활동과 유니세프 최초의 홍보대사로 유명한 인물이다. 이러한 업적으로 프랑스 [[레지옹 도뇌르 훈장]] 슈발리에 등급,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다.] 국제어린이(예술)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된 결정적 계기도 대니 케이가 아닌 오드리 헵번이었다.[* 이 대회는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열렸는데 폐지년도를 보면 헵번이 사망한 뒤로는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.] 이런 모습 덕분에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가 [[나치]] 동조자였다고 욕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본전도 못건진 채 배로 비난세례를 받았다. 그의 아버지는 오드리가 어릴 때 집을 나갔으니 영향을 받을 겨를도 없었으며, 오드리 헵번은 '''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들 중 하나였다.''' 위에도 여러 번 서술하듯, 네덜란드로 갔던 어렸을 적 [[http://en.wikipedia.org/wiki/Dutch_famine_of_1944|독일군이 최후의 발악으로 식량을 죄다 수탈해가는 바람에 튤립 구근을 캐먹고 벌레도 먹고 쓰레기까지 뒤져먹을 정도로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고]] 네덜란드가 해방된 후 연합군과 유니세프가 지원해 준 [[연유]]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났던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.[* 실제로 장시간 굶은 후에는 미음부터 천천히 먹어야 한다. 그러지 않으면 소화기관이 버티지 못해 탈이 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. [[석가모니]]도 장기간 단식수행을 하다가 단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먹은 첫 음식이 [[타락죽]]이었으며, [[단식투쟁]]을 허구한 날 하는 정치인들도 단식을 중단하고서도 바로 식사를 시작하진 못하고 병원에서 수액으로 먼저 영양 보충을 받은 후 미음으로 기력을 회복한다.]([[http://armishel.tistory.com/165|#]]) 게다가 [[2차 세계대전]] 기간 고향 네덜란드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[[레지스탕스]] 활동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 밝혀졌다.[[http://www.hankookilbo.com/News/Read/201904121529093766|#]] 이때의 경험을 아들에게 "연합군 병사를 돕는 것이 위험했으나 스릴 넘치는 것이었다. 발각되면 전 가족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던 만큼 공포감에 시달리기도 했다"고 말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audrey hepburn in ethiopia march 1988.jpg|width=100%]]}}}|| || 1988년 3월, [[에티오피아]] || 이러한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은 오드리 헵번이 자선사업 활동을 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. 자신도 한때 전쟁 난민이었기 때문에, [[수구초심|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]]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